[천자칼럼] 문화대혁명

입력 2016-05-15 17:45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지난해 10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영국 런던을 방문했을 당시 자신은 청년시절에 ‘사느냐 죽느냐’라는 햄릿 대사를 항상 되뇌며 살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문화대혁명으로 16세에 베이징에서 산시성(陝西省) 농촌마을로 보내져 7년간 농민 생활을 한 시 주석으로선 이 대사가 가슴 저리게 와닿았을 것이다. 물론 시 주석만이 아니다. 지금 60대 중국인들에게 문화대혁명은 잊고 싶지만 잊기 어려운, 너무나 뼈아픈 기억이다.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학생이 선생을 폭행하고, 곳곳에서 폭력이 자행되는 그런 시대였다. 오죽했으면 중국시인 파금(巴金)은 이때 “배를 가르고 심장을 도려내고, 칼산에 오르고 기름끓는 가마솥에 떨어지는 징벌을 다 받는 기분”으로 살았다고 했을까.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16일 중국 공산당 정치국회의에서 낭독된 ‘5·16통지’에서 비롯됐다. 자본주의와 봉건주의, 관료주의 문화가 아직 공산당과 중국 사회 곳곳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60년대 초 대약진정책 실패로 많은 아사자를 낸 뒤 권위가 떨어진 마오쩌둥이 벌인 희대의 권력투쟁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

문화대혁명은 홍위병(紅衛兵)이 출현하면서 광기로 변질했다. 중고교생들로 구성된 홍위병들은 자신을 구시대 유산을 제거하고 부르주아 요소를 없애는 데 앞장서는 혁명전사로 규정했다. 이들은 도처에서 마오쩌둥을 보호하자는 구호를 외쳤고 누군가가 지목한 정적에 대해 마녀사냥을 벌여나갔다. 홍위병들은 수업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기차 버스 배 모두 공짜였다. 홍위병 증명서만 있으면 돈도 전국의 홍위병 접대소에서 빌릴 수 있었다. 급기야 홍위병들끼리 마오쩌둥 사상의 진정한 대변자를 다투는 무장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문혁으로 100만명 이상이 탄압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오쩌둥이 죽은 1976년에야 대란은 끝났다.

문화대혁명 10년간 중국은 암흑국가가 되고 말았다. 지식은 귀신이나 잡귀로까지 취급됐다. 중국 전역의 학교가 폐쇄됐으며 대입시험도 취소됐다. 학교 건물이 파괴되고 도서관 책은 불에 탔다.

최근 중국의 상황이 마치 50년 전 문화대혁명 시기와 비슷하다는 외신보도가 자주 흘러나온다. 시진핑의 개인숭배 풍조가 확산되고 언론·사상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 주석의 권위를 높이려는 ‘핵심의식’이라는 단어도 지도부 내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1당독재는 언제나 1인독재로 변질되는 것일까.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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